#4 - 20달러 플랜과 200달러 플랜의 차이
토큰 제한이 만들어내는 결과의 차이
날씨가 유난히 맑고 화창해서 창문만 바라봐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한 주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저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이 날씨를 최대한 즐길 수 있을까…’ 하고 효율충다운 고민을 하더군요…ㅎㅎ
한편으론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살짝 벅찬지, 이렇게 좋은 날씨에 주변에 안부 문자 한 통 보낼 에너지조차 부족한 게 좀 원통한 일주일이기도 했어요. 내년 이맘때쯤엔 마음에 좀 더 여유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봅니다.
첫 번째 글에서 클로드 200달러 플랜을 20달러 플랜으로 자발적 다운그레이드 했던 거 기억하시는지요.
챗GPT 프로가 처음 나왔을 때, 너무 궁금했지만 200달러 지출이 꽤 부담스러워서 여기저기 후기와 효용을 물어봤었어요. 20달러에서 200달러는 자그마치 10배 큰 지출이니까요. 선뜻 결제 버튼이 눌러지지 않아서 결제창을 들어갔다 나갔다 며칠을 반복했었어요.
근데 모든 소비가 그렇듯, 턱은 한 번 넘는 게 힘들지 넘고 나면 두 번째는 쉽더라고요. 요즘 AI관련 지출 금액에 점점 무뎌지는 것 같아요.
200달러 플랜을 쓰다 20달러로 내려와 보니 역체감 되는 것들이 몇 개 있어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장점
1.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이 달라져요.
책을 통째로 뜯어 맛볼 수 있어요. 커다란 데이터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고요. 지난 글 끝에 소개한 사주 챗봇을 만들면서 처음 실행해본 프로세스인데요
깊은 지식이 정리된 책 구매 → 전체 스캔 → 작은 지식 단위로 분해 → 나만의 RAG·위키 구성 → 관련 지식만 뽑아서 에이전트 팀에 이식.
이 프로세스는 웬만한 토큰량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에요. 일반 단행본은 어떻게든 가능해도 전공서는 안 되겠더라구요.
지금 제 RAG에 누적된 게 책에서 뽑아낸 Knowledge Atom 1,836개, 가설 질문 9,085개 정도예요. 20달러 플랜으로는 이 작업의 시작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컨텍스트에 올려놓고 분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증기가 ‘동력 혁명’이었다면 컴퓨터는 ‘지성 혁명’이라고 하던데, 200달러 플랜으로 처음 책 한 권을 통째로 뜯어봤을 때 체감한 게 정확히 이거였어요. 단순히 빨라진 게 아니라, 가능한 사고의 폭 자체가 달라진 거죠.
2. 큰 조직 규모의 에이전트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어요.
여러 팀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있어요. 상세페이지를 만든다고 하면
리서치 팀에서 VoC 수집 및 시장 조사 → 디자인 팀에서 브랜드 디자인 시스템 정립 → 상세페이지 팀에서 내용 구조 및 메시지 설계 → 카피라이팅 팀에서 메시지 검토
이런 식으로 여러 팀이 협업하는데, 작은 토큰을 쓰니 1단계에서 세션 리밋이 걸려버려요. 에이전트 팀 시스템 문서를 읽는 것만으로 토큰 한도에 도달하더라고요. 열심히 쌓은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랄까요. 역할을 더 효율적으로 정의하고 분할 실행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원하는 풀 프로세스를 한 번에 구현하기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굴리는 시스템이 263개 에이전트, 9개 카테고리, 30개 팀 규모예요. 이 정도 되면 본 게임(실제 답변 생성) 외에 안전장치 (새 버전 검증, 결과 비교, 성능 저하 감지 같은 것들)까지 함께 돌려야 안심이 되는데, 20달러 플랜으로는 그 안전장치를 한 줄도 못 켜고 본 게임만 겨우 돌립니다. 200달러 플랜은 그제야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게 해주는 자원이라는 얘기죠.
3. 당연하지만, 더 빠르게 개발할 수 있어요.
쉬지 않고 개발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이든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어요. 시간의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는 세상에서 금 같은 시간을 아낄 수 있고요.
깊은 몰입의 길이가 결과물의 깊이를 결정하므로, 세션 리밋이 없다는 건 곧 깊은 몰입의 상한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단순히 빨라지는 게 아니라 ‘몰입을 끊지 않을 권리’를 사는 거죠. 다만 이게 그대로 단점으로 뒤집힐 수 있다는 게 함정이에요.
단점
1. 책상 앞에서 일어나기가 어려워요.
기본적으로 저는 한 번 몰입하면 의자에서 일어나기가 어려운데, 세션 리밋 없는 클로드는 밤새 다음 할 일을 던져주며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기절하듯 잠드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앉아있어요. 물론 과정이 너무 재밌어서 막 엄청 괴롭진 않은데, 어느 순간 건강이 안 좋아지는 느낌이 크게 들더라구요. 게다가 혼자 일하니 아무도 저한테 밥 먹자, 퇴근하자고 해주는 사람이 없어…🥹 레드 플래그 감지조차 어려운 환경이죠.
방해받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은 너무 좋지만, 제 문제는 몰입할 벙커는 만들었는데 나가는 문을 안 만들었다는 거죠. 항상 대기하는 디지털 기술이 우리 시간을 빼앗고, 세션 리밋의 부재는 이걸 24/7 모드로 한 단계 더 밀어붙입니다.
2. 필요 없는 것도 만들게 돼요.
시스템이 괜히 과해져요. 200달러 플랜에서 만든 AI 에이전트 팀이 20달러로 내려오니 작동을 안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결과물의 퀄리티가 엄청 달라지나? 결과만 놓고 보면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차이는 결과물의 퀄리티가 아니라 시도해본 경로의 다양성이었어요. 똑같은 도착지를 더 많은 길로 가본 것뿐이지, 도착지 자체는 다르지 않았고요. 만든다는 기쁨에 취해 나도 모르는 새 과한 프로세스를 짰다는 방증 아닌가 싶어요.
도널드 커누스가 1974년에 쓴 Structured Programming with Go To Statements에 이런 문장이 있어요
“우리는 작은 효율을, 한 97% 정도는 잊어야 한다. 미숙한 최적화가 모든 악의 뿌리다.”
50년 전 소프트웨어 공학에서 한 경고가 AI 에이전트 시스템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게 좀 웃기죠. 비슷한 결에서 Essentialism에 간디의 ‘reducing himself to zero’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자기를 영점으로 줄이는 그 과정도 결국 같은 얘기로 통하게 돼요. 자원을 줄이면 본질만 남아요. 자발적 다운그레이드로 한 일이 우연히 에센셜리즘의 실천이었던 셈이죠.
3. 뽕 뽑아야겠다는 부담감에 시달립니다.
효율충인 제 특성인지는 몰라도, 왜 그렇게 구독한 만큼 뽕을 뽑아야지 라는 생각이 드는지요. 200달러 쓸 때 세션 리밋이 안 걸리면 불안해지는 마음을 아시나요..? 자는 동안 쓰지 못하는 토큰이 아까운 마음을 아시나요..? 그래서 한동안 자는 동안 계속 돌려보기도 했는데, 지난 글들에서 썼듯이 대부분 80% 쓰레기를 양산하는 데 그친다는 걸 깨닫고 잘 땐 그냥 맘 편히 자기로 했습니다. AI 헤비 유저 분들 중 이걸 해결한 분이 있다면.. 좋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운그레이드
결론적으로, 맥스 플랜을 쓰는 분은 한 번 줄여보시길 추천하고, 낮은 플랜을 쓰는 분은 눈 딱 감고 한 번 높여서 지출해보시면 좋겠어요.
다운그레이드 경험이 중요한 건, 토큰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인풋&아웃풋의 길이를 최적화하는 차원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골라서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200달러를 구독하면 질문의 질이 한층 발전한 본인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에이전트 워크플로우에서도 중요한 것만 남기고 가지치기를 할 수 있고요.
디자인 씽킹 방법론과 비슷한데, 넓게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좁히는 과정에서 점점 본질에 가까워지죠. 영국 디자인 카운슬이 2005년에 정리한 ‘Double Diamond’ 모델이 정확히 이 발산-수렴 구조예요. 부풀린 시스템을 한 번 줄여본 경험은 첫 번째 다이아몬드의 ‘Define’ 단계에 해당하고요. 그 다음 다시 200달러를 결제한다면 그건 두 번째 다이아몬드의 발산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다운그레이드는 후퇴가 아니라 모델 안의 한 국면일 뿐이고, 그 국면을 지나야 더 정밀한 발산이 가능해지는거죠.
상승국면 초입의 디지털 월세
다만, 문제는 이 모든 현상이 결국 자본과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이것저것 많이 쓰려면 디지털 월세가 생각보다 많이 나갑니다. 저만 해도 고정비(제미나이,클로드,GPT) 10만 원에 변동비(필요하면 골라쓰는 툴들: 젠스파크, 더 높은 크레딧의 요금제, 미드저니, 새로 나오는 툴 등등) 10만 원이 더해져 매달 평균 20만 원쯤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국밥 20그릇이니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정기 수입이나 자본이 받쳐주는 환경이라면 별거 아니겠지만,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제까지 있었던 교육 격차, 정보 격차, 스마트폰 격차보다 더 큰 격차를 만들어내는 변수라고 생각해요.
이미 국제 담론에서 같은 얘기가 나오고 있더라고요. UN 산하 UN University 분석은 “AI 시대의 격차는 접근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시성의 격차이기도 하다”라고 짚습니다. 검색과 AI에 잡히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얘기죠. Global Digital Inclusion Partnership은 이걸 “AI for the Global Majority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디지털 격차”라고 부르고요. Stanford Social Innovation Review의 'The Low-Cost AI Illusion' 섹터 분석은 더 구체적인데, “지금의 ‘무료’ 또는 보조금 받은 AI는 일시적 단계이지 안정 상태가 아니다.” 디지털 월세가 앞으로 더 오를 거라는 외부 신호인 셈이고요.
더 큰 신호도 있어요. 세계경제포럼이 2026년 4월에 "AI 인프라를 전기·운송·통신처럼 핵심 인프라로 다뤄야 한다"는 글을 올렸는데, 이건 가격이 오를 거라는 얘기를 넘어서 AI 인프라 자체가 사적 자원에서 공공 인프라로 격상되고 있다는 얘깁니다. 가격 인상보다 더 무서운 건 이쪽이에요. 핵심 인프라가 됐다는 건 그게 없는 사람은 점점 더 사회 작동에서 밀려난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매월 디지털월세를 내며 체감하던 격차를 국제기구들도 같은 방향으로 보고 있는거겠죠.
마치며 짧은 단상..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과 논쟁이 많이 오갑니다. 꽤나 급진적인 생각이긴한데 제 생각으로는, 기본소득보다는 국민 모두에게 매달 AI 크레딧을 주는 국가가 되면 더 획기적인 국가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 비용이 모두 외국계 회사로 흘러들어간다는 게 정말 안타깝긴 하지만, 질 높은 교육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든 대한민국에서, 그 교육이 21세기에도 작동하기 위한 인프라이지 않나 싶은… 정책 문외한 과학기술덕후 공돌이의.. ㅎㅎ 짧은 생각입니다.
(정책 전문가분들의 비판적 시선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 쓰면서 찾아보니 이미 비슷한 제안이 있더라고요. OpenAI CEO 샘 알트먼은 ‘Universal Basic Compute(UBC)’라는 걸 제안했는데,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UBI는 경제 생산의 산출(현금)을 분배해서 빈곤을 해결한다. UBC는 경제 생산의 수단(컴퓨트)을 분배해서 일자리 대체 문제를 해결한다.”
모두에게 GPT-7의 컴퓨트를 한 조각씩 주고, 본인이 쓰든 재판매하든 암 연구자에게 기부하든 알아서 하라는 거죠.
한국도 무에서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2026년 1월부터 ‘AI 기본법’이 세계 최초로 전면 시행됐고요. 2026년 AI 예산이 약 5조 1천억 원(전체 예산의 1/5)에 달하고, 기존 AI 바우처와 클라우드 바우처를 통합한 ‘AX 원스톱 바우처’가 260억 원 규모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미 ‘바우처’ 형식의 AI 크레딧 정책이 기업 대상으로 작게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고, 제 제안은 그걸 ‘기업 대상에서 전국민 대상으로 확장하자’는 양적 변형에 가깝다고 봐야 정확할 것 같아요.
다만 솔직히 말하면 비판도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영국 CapX의 UBI 비판론은 “수령자를 외국 기업의 종속 소비자로 만든다”는 우려를 주된 논거로 드는데, 이건 제가 위에서 “비용이 외국계 회사로 흘러간다”고 짚은 그 우려와 정확히 같은 지점이에요. 그래서 만약 진짜로 전국민 AI 크레딧을 설계한다면 국내 모델·인프라 투자와 패키지로 묶이는 게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AI와 함께 커머스 브랜드를 만들고 있는 주니어 CEO 스테파니입니다.
2022년 말 ChatGPT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생성형 AI 커뮤니티 BetaAI를 리드하며 AI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1년간 AI 에이전트 팀과 엎치락뒤치락하며 대기업 직장인 연봉만큼의 매출을 만들었고, 지금은 AI와 사람 사이의 균형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든 것이 누군가의 일상에 작은 즐거움을 선물하는 순간을 가장 사랑합니다. 삐뚤빼뚤하지만, 계속 전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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